아차산의 보루성은 남한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고구려군의 병영지로 현재까지 사적으로 지정된 것만 16개소에 달하고 있다. 이 보루성들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중요한 증표로 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유력한 유적으로서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 광진구의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아차산 유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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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보루성들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연한 기회에 아차산의 보루성을 발견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25년 넘게 아차산의 보루와 한반도의 고대사연구에 헌신하고 있는 광진구의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디지털광진에 ‘아차산보루군의 발견경위와 과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아울러 보루성을 발견한 후 1990년 2월 문화재청에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일대의 성곽유적조사를 청원한 청원서(국가기록원)와 그해 6월 문화재관리국의 전문가에 의해 수개월 동안 조사한 결과를 취합한 <서울 長城 遺蹟調査 槪略報告>도 증빙자료로 보내왔다.
김민수 선생의 글과 증빙자료를 종합, 요약하면, 아차산의 보루군이 세상에 발견된 것은 지난 1989년 영화사 서편 기슭의 화재진화작업에 참여했던 김민수 선생이 화마가 삼키고 간 산 능선에서 길게 이어진 돌무지들을 발견하면서 부터다. 당시 김민수 선생은 관방시설임을 직감하고 아차산일대를 뒤졌으며, 병영지, 차단성, 무너진 석탑, 돌무덤의 유구 등 수많은 유적을 발견했다. 김민수 선생은 이와 같은 내용을 정리해 행정기관과 학술기관에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해 조사결과 보루성들은 망루로 인정받으며 고구려의 보루성들은 역사학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에도 김민수 선생은 1994년 「漢江流域에서의 三國史의 諸問題」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부록편에 「阿且城 주위의 城圖 해설」란을 따로 두어 지금의 보루성들을 국립지리원 지도에 표시했다. 또한 보루성들을 실측하고 처음으로 보루성의 명칭을 붙였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학계에는 구리문화원 아차산학술조사단에 의해 1995년 발간된 자료집인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처음 아차산을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료집 뒷장의 ‘아차산의 유적학술조사 순차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김민수 선생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89년부터 관련내용을 책자로 발간하여 관계기관과 학계에 배포해왔다. 처음 배포한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는 1990년에 문화재관리국에 조사청원한 <阿且山·龍馬山·忘憂山 일대의 城郭 및 遺蹟 調査 請願>에 첨부되어서 대전 국가기록원에 영구보관 되어 있다. 그해 문화재관리국의 전문가에 의해 수개월 동안 조사한 <서울 長城 遺蹟調査 槪略報告> 또한 문화재청에 영구보전 문서로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차산보루군은 최초 발견이후 수많은 연구와 발굴을 통해 고구려의 유적으로 확인되었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홍련봉보루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등 지속적인 연구와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보루성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이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린 과정 또한 왜곡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편집자 주)
▲ 1990년 발행된 서울장성유적조사 개략보고서에 나오는 용마산 우측 봉우리 남측구간 보루성 유적사진 ©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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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보루군의 발견 경위와 과정-
향토사학자 김민수
아차산의 長城유지에 대한 언급은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朝鮮古蹟調査報告書」에서 ‘고양·양주 두 군에 걸쳐서 장성의 유지가 있다. 뚝섬면 한강 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높은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른다. …… 峨嵯山에 들어가서는 돌이 풍부하기 때문에
石築으로 변하고 있다. …… 아마 백제시대의 중요한 유적이라고 인정되지만, 전체 조사는 일정 때문에 미루었다’라고 한 것이 처음이다.
1989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에서 발간한 「韓國의 城郭과 烽燧」 上 서울長城 조에서 이러한 장성의 유구를 답사한 기록을 남겼다. 덧붙여서 ‘이 성벽은 성동구와 성북구에 걸쳐 있는 장성으로써 아차산성이나 기타 중곡동·면목동 그리고 구리시 아천동 등을 거쳐서 성북구 중계동성지와도 연결되어야 할 성벽의 축조물로 알려져 있다’라고 했다. 지적한 범위로 볼 때 살곶이목장(箭串場)의 담벽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다다음 해(1991년)에 尹武炳도 「斗溪선생과 史蹟답사」라는 기행문에서 이병도(斗溪)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이러한 장성지를 목마장의 담벽일 것으로 추정했다.
서울 근교의 성곽의 유구들은 1942년에 와서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간략히 정리됐다. 여기서 사적 아차산성을 古山城이라고 하고서 峨嵯山城 또는 阿且城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그마한 壘址들을 언급했다. 대체로 현재 광진구의 광장동, 구의동, 능동, 중곡동 그리고 중랑구의 면목동과 구리시의 여러 壘址들이다. 이 루지들 중에서 아차산 일대의 보루성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1973년에 林炳泰는 그의 논저 「漢江流域 無文土器의 年代」에서 아차산의 선사시대의 유적을 소개하면서 본문이 아닌 脚註에 ‘俄嵯山에서는 산성 능선을 따라 여러 곳에서 三國時代初期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무려 십여 곳에 주거지가 아니면 소규모 산성으로 보이는 유적을 조사했다. …… 형편이 되는 대로 발굴할 계획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막연한 기록이 일본인들이 1942년에 조사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의 아차산의 성곽 유구를 해방 후에 처음 확인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조치는 없었다.
서울의 동부권에 해당하는 아차산 기슭은 워커힐호텔, 건국대학교, 세종대학교, 어린이대공원이 들어선 곳이다. 1967년에 화양지구가 개발되었다. 이어 1973년에 중곡지구가 개발되면서 지금의 광진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중곡동고분군을 위시한 일본인들이 조사한 유구들이 이때 대부분 소실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아차산 능선 상의 유구들도 살곶이목장의 부수시설로 간주했다. 때마침 아차산 일대는 애림녹화사업이 진행되면서 모든 유구들이 아카시아나무와 덤불들이 엉클어져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 1990년 2월 김민수 선생이 제출한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의 성곽및 유적조사 청원 표지. 이 문서는 현재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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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늦여름 아차산 영화사 西편 기슭에서 큰 산불이 발생했다. 진화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火魔가 삼키고 간 산 능선에서 길게 이어진 돌무지들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돌무지들은 산마루 마루에서 큰 구덩이들이거나 바닥이 평평한 구릉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차산은 물론 용마산, 망우산까지도 그랬다. 필자는 사적 아차산성이 연상되었고 이에 관방시설임을 직감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서 아차산 일대를 뒤졌다. 돌무지들과 연결된 兵營地, 능선의 골을 막은 차단성, 무너진 석탑의 석재들, 돌무덤의 유구들, 폐허가 된 사찰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지, 실로 필자의 확신을 굳혀 가는 유적·유구들이 신기루처럼 다가왔다. 필자는 이러한 문화유산들을 행정기관(區·市)과 학술기관(중앙박물관·문화재관리국·국편·시편)에 조사해 줄 것을 서면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요식적인 회신뿐이었다. 그래서 필자 자신이 직접 펴낸 논문자료집이 1990년 1월에 발간한 「阿且山城의 再發見과 簡考」다. 먼저 장성과 병영지(今,보루성)를 나름대로 만든 지도에 표시했다. 이외의 유적·유물의 사진들도 첨부했다. 그리고 서울시내의 대학 및 학술기관에 배포했다. 학술기관에게는 「아차산의 재발견과 간고」라는 논문자료도 첨부하여 「阿且山·龍馬山·忘憂山 일대의 城郭 및 遺跡 調査 請願」이라는 청원서를 1990년 2월 24일에 제출했다. 이 청원은 문화재관리국(청)에서 받아들여졌다.
▲ 김민수 선생이 1990년 1월에 발간한 「阿且山城의 再發見과 簡考」논문 표지. 김민수 선생은 이 논문에 그때까지 발견된 장성과 병영지를 나름대로 만든 지도에 표시했고 유적과 유물들의 사진도 첨부했다. 이 논문은 현재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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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관리국은 성곽전문가인 孫永植, 토목기사 朴基和, 건축기사 徐相洛을 조사원으로 선정하였고, 필자는 안내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이 조사하여 1990년 6월에 취합한 보고서가 「서울長城 遺跡調査 槪略報告」다. 34쪽의 보고서는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의 능선을 거치는 장성지를 백제시대의 축조한 성곽으로 추정했다. 산마루마다 있는 高臺(보루성)도 망루로 인정했다. 그리고 무너진 석탑, 돌무지무덤, 건물지 등 기타의 유물·유적들도 상세히 실측하여 조사했다. 필자 또한 이러한 조사결과를 1990년 10월 29일 문화재관리국 최태용으로부터 서면으로 통보받았다.
이후 아차산은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金永上(1992년)은 아차산 능선 상의 장성지를 신라의 長漢城으로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李道學(1992년)은 백제 또는 고구려가 축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993년 구리문화원은 필자에게 아차산의 고대사를 재조명하는 학술지 발간을 의뢰했다. 그래서 그해 9월에 발간한 논문이 「百濟의 慰禮城과 北漢山城」이다. 논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차산 일대의 성곽과 유구들을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1994년)에 구리문화원은 학자들로 구성된 학술조사단을 구성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고중세사실을 위주로 하여 아차산 일대의 유적들을 조사했다. 필자는 이들에게 유적지 안내는 물론 자료가 되는 것들을 제공했다. 또한 그때까지 취합한 자료들과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여 「漢江流域에서의 三國史의 諸問題」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부록 편에서 「阿且城 주위의 城圖 해설」란을 따로 두어서 지금의 보루성들을 국립지리원 지도에 표시했다. 또한 개개의 보루성들을 실측하고, 여기서 채집한 고구려토기들을 모두 실었다. 1990년에 아차산 일대의 병영지를 발견하고 나서 이때 와서야 처음으로 보루성의 명칭을 붙였다. 지금은 약칭(?)하여 보루라고 한다. 이 논문은 1994년에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한 ‘향토사료연구논문’ 공모에서 으뜸상(문화체육부장관상)으로 선정되어서 그해 12월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수상발표회를 가졌다. 같은 달 국사편찬위원회 閔德植·金洸 그리고 필자가 공동으로 내놓은 자료가 「서울 城東 峨嵯山城 일대의 城郭遺蹟 踏査記」이다. 이 자료에서 민덕식은 보루성의 유구들이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壘址들과의 관계를 고증했다.
▲ '1990년 서울장성 유적조사 개략보고에 나오는 서울장성 주변 현황도 보루성이 발견된 능선을 따라 굵은 선이 그어져 있다. ©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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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구리문화원 아차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간된 자료집이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이다. 여기 ‘Ⅲ. 문화유적(심광주·윤우준)’ 편에서 지금까지 알려졌던 아차산의 유적들을 망라하여 자세히 정리했다. 지금의 보루성의 유구들에 대해서는 그냥 고구려의 유적이 라고만 명명했다. 이 자료집은 1994년 8월 31일을 발행일로 명시했다. 그러나 필자의 수상논문 「한강유역에서의 삼국사의 제문제」 다음에 발간한 것이다. 발행일을 소급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에서 맨 처음 아차산의 보루성들을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뒷장의 <아차산의 유적학술조사 순차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필자는 훨씬 이전인 1989년부터 조사하여 줄곧 책자로 발간하여 관계기관과 학계에 배포했다. 처음 배포한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는 1990년에 문화재관리국에 조사청원한 <阿且山·龍馬山·忘憂山 일대의 城郭 및 遺蹟 調査 請願>에 첨부되어서 대전 국가기록원에 영구보관되어 있다[찾아보기,Ⅰ]. 그해 문화재관리국의 전문가에 의해 수개월 동안 조사한 <서울 長城 遺蹟調査 槪略報告> 또한 문화재청에 영구보전 문서로 보관되어 있다[찾아보기Ⅱ]. 문화재를 총괄하는 문화재관리국(청)에 자료로 작성하여 보고하였고, 그 조사한 결과를 취합한 것이 학계에서 확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아차산의 유적들을 찾아내고 이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필자의 수고가 뭉개지고 희석된
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뒤늦게 공적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호도하고 있는 사실에 분개한다.
▲ 1990년 김민수 선생의 청원서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의 성곽 및 유적조사 청원'의 한 부분. 당시 김민수 선생은 그때까지 직접 조사한 내용을 청원서에 담아 조속한 유적조사를 청원했다 ©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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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의 유적학술조사 순차목록
▲ 아차산 유적학술조사 순차목록을 보면 맨 앞에 김민수 선생이 작성한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간고'라는 목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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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의 보루성들은 남한 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구려軍의 병영지이다. 한강하류의 목을 지키기 위해 능선 상의 봉우리마다에 보루성을 쌓아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학술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확인하는 중요한 증표다. 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에 맞서서는 온 국민의 분노의 함성을 결집시켰던 곳이다. 하여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사적 제455호 ‘아차산일대보루군(2004.10.27)’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뜨거운 성원과 엄청난 지원으로 진행하고 있는 고고학적인 발굴작업은 그 성과가 신통하지 않다. 본고에서도 지적했듯이 고구려의 한강하류 유역의 통치기간이 문헌사의 입장과 상당한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발굴자들은 작은 보루성 하나만 가지고서도 여러 차례 나누어 해마다 발굴하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그러나 수차례의 발굴결과는 기존의 ‘고구려 76년 통치說’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논거들을 일률적으로 제시할 뿐이다. 이렇게 상당한 기간 동안 고구려가 아차산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한강하류 유역을 통치하고 있었다면, 평지 어딘가에 고구려의 治所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이 죽어서 묻힌 고구려의 무덤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차산 일대의 보루성들은 장기간 거주한 성들이라고 보기에는 하나같이 치졸하게 쌓았다. 보루성 내에서 출토되는 고구려의 토기들은 5세기말까지 주로 사용하였던 연질토기들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실로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고 사적으로 지정된 것만 16개소이다. 지정되지 않은 4개소가 더 있다. 소실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30여 개소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유적群을 한 學脈에 의해서이거나 그 주관자의 영향 하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의 새로운 견해가 제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른 발굴기관에게도 발굴할 기회를 주어서 형평성을 유지하고 자료의 공유와 공개가 확대되어야 한다. 나아가 발굴자료를 집합할 수 있는 고구려박물관이 건립되어야 한다. 연구자와 시민들이 쉽게 한 장소에서 고구려의 자취와 기상을 직접 볼 수 있는 장소가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영남권 지역 여러 곳에 국립가야박물관이 있다. 고구려의 실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아차산에 고구려박물관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보공개청구 안내
대한민국 정보공개 포털 www.open.go.kr에 들어가면 정보공개안내 →정보공개 청구서 다운로드 양식을 작성한 후, 각 해당 접수처에 접수하면 [찾아보기Ⅰ·Ⅱ]의 원문정보를 받아볼 수 있음(소정의 수수료 납부).
[찾아보기Ⅰ] 阿且山·龍馬山·忘憂山일대의 城郭및 遺跡調査請願
<접수처> 국가기록원 ☎ 042-481-4305, 팩스번호 042-472-3906
[찾아보기Ⅱ] 서울 長城遺蹟調査槪略報告
<접수처> 문화재청 정보화담당관실 ☎ 042-481-4770,
팩스번호 042-481-4779
▲ 1990년 6월 문화재관리국에서 만든 '서울장성 유적조사 개략보고'표지. 이 문서는 현재 문화재청에 영구 보관되어 있다. © 디지털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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