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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와 주류성』 학술서 발간
광진문화원, 백제 도읍지 위례성과 백제부흥군 왕성 주류성 연구서 발간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8/03/23 [16:15]

 광진문화원은 한강유역에서 제일먼저 나라를 세운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과 마지막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을 연구한 학술서 위례와 주류성을 발간하였다. 백제의 시작과 끝을 정리한 것이다.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의 위치문제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옛 문헌에서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비정되어 왔다. 그러나 근래의 고고학의 발전과 그 발굴과정에서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었으며, 몽촌토성이 그에 딸린 별궁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백제의 도성체제는 한강하류를 방어선으로 하여 그 도하점을 지키는 한강 북쪽의 아차산성과의 관방체제가 확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은 한강하류의 남·북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소정방의 수군의 협공으로 의자왕이 잡혀 당나라로 끌려간 660년에 멸망한 것이 아니다. 백제의 유민들은 부여와 공주에 주둔한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급기야 일본에 체류한 풍왕을 맞아들여 백제의 부흥을 선언하였다. 일본 또한 왕이 직접 주관하여 백제에 구원군을 보냈다. 그 거점이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서의 주류성이다. 이러한 주류성의 위치를 개괄하여 파악한 학술서이다.  

 

 

▲ 천안 성거산 위례상. 김민수 선생은 이곳이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왕성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사진출처 -한국민속문화대백과)     © 디지털광진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검토의 논문의 간해

광진구의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은 광진문화원이 발간한 위례와 주류성의 학술서에서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검토를 논증하였다.

 

▲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 ©디지털광진

주류성은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백제유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 또한 일본에 체류한 풍왕이 왜군을 거느리고 백제로 건너와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 급기야 그는 백제부흥운동의 총수였던 복신까지 참살하였다. 따라서 백제부흥운동은 친왜세력에 의하여 이끌려갔다. 또한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던 왕자 부여융은 당군과 함께 돌아와 친왜세력인 풍왕의 백제부흥군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가 백제부흥운동사를 폄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게 하였다.

 

일본은 백제부흥운동, 특히 663년에 그들이 400여척의 함선을 백제에 보내 당나라 수군과 싸운 백강전투를 높이 평가한다. 패했지만 7세기 후반에 일본은 거대한 당나라와 한반도에서 대적했다는 자부심이다. 이러한 일본의 자부심은 한반도 간섭의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유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으킨 거사였다. 당나라의 주둔군에 맞서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 그 숭고한 가치가 폄하될 수 없다. 신라 또한 당나라 수군의 도움을 받아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신라의 문무왕은 항복한 왜군들에게 그들 나라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선처하였다. 사면권은 군 통수권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다. ·당연합군의 총수가 신라의 문무왕임을 선언한 것이다. 비록 한반도의 백제영토에서 당나라와 일본의 왜군이 와서 싸웠지만, 주체는 신라와 백제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필자는 한반도에서 백제사를 마무리한 주류성 전투를 세세히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삼국유사를 비롯한 옛날 문헌에서 천안 성거산 위례성이 백제의 시조 온조가 건국한 곳이라 기록한 것은 백제부흥운동의 주류성을 오랫동안 각인한 결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천안 성거산 위례성의 수많은 전설들은 백제가 멸망하고 난후의 백제왕의 이야기들이다. 멸망한 백제왕인 부여풍이 이곳 성거산 위례성의 용샘에서 서해바다로 나아가 부여의 당성으로 들락거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밤에만 다녔다. 백제부흥군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천안 성거산 위례성이 백제부흥군의 왕성인 주류성이라는 새로운 학설은 학계에 큰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본 논문의 [국문요약]은 다음과 같다.

 

[국문요약]

백제의 멸망과 백제부흥운동은 정치사의 관점에서 각기 따로 연구하여 왔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백제부흥운동사를 별개의 영역으로 고립시켰다. 이에 본고는 백제의 멸망과 백제부흥운동을 같은 사건의 연속으로 파악하였다. 우선 660년 당시의 신라군도 당水軍과 마찬가지로 水軍작전으로 한강하구를 빠져 나가서 웅진강구에 상륙한 사실을 밝혔다. 웅진강구는 唐將 소정방과 신라김유신이 덕적도회합에서 710일에 만나기로 약속한 백제의 이다. 지금의 금강하구이다. 고려되었던 상륙작전의 하나가 백제의 으로써 白江이다. 지금의 아산만구이다. 660水軍은 각기 백강으로 진입하지 않고, 백강을 넘어서 그 남쪽의 웅진강구로 상륙한 것이다.

 

663년에 있었던 주류성 공함작전에서 당水軍은 웅진강구에서 거꾸로 北進하여 백강구로 진입한다. 따라서 신라의 육군도 웅진성에서 北進하여 주류성으로 진격한 것이다. 이러한 위치에 합당한 주류성은 천안 성거산 위례성임을 밝혔다. 성거산 위례성은 󰡔삼국유사󰡕를 비롯한 저명한 古書에서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위례성으로 지목하여 왔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은 백제부흥군의 왕성으로서의 주류성을 오랫동안 각인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성거산 위례성의 전설은 백제부흥운동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백제왕이 부여를 그리워하여 밤마다 이곳 용샘에서 서해를 통해 백마강으로 들락거렸다,는 것이다. 백제부흥군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다. 백제를 복원하기 위한 환상들이 이야깃거리가 되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성거산 위례성은 백제부흥군의 왕성으로서의 주류성이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검토(향토사학자 김민수) 논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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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23 [16:15]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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