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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정신과 진단을 하면서 겸허해지는 이유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단 ‘NMHC 정신건강동향’ 수록 칼럼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9/02/12 [16:02]

최근 정신질환자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있었다. 이런 기사를 자주 접하다보니 정신질환자들이 전보다 더 자주 증상이 악화되거나 재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는 정신질환의 특성과 현재의 치료제도 등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진단은 중요하지 않다.’ 정신과 수련을 시작할 때부터 반복해 듣던 말이다. 정확 한 진단을 해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지만 정신질환의 원인은 물리 법칙처럼 단순하지 않다. 암이나 감염처럼 검사로 확인할 수도 없다. 게다가 정상과 질환의 경계가 명확치 않고, 그 기준조차도 시대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이다.

 

진단기준이 있지만, 의사는 진단의 한계와 이후의 영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 세 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진단분류는 미국에 서 2013년에 출간된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 5>이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반드시 경험 있는 전문가에 의해서 사용되어야 하고, 특히 법적인 용도로 함부로 사용 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는 처음에 성적 일탈로 분류되었으나 미국 정신과학회에서 의학 적 검토와 논란 끝에 1973년에 정신질환 에서 제외되었다. 군인들이 전투 후에 극심한 불안을 경험 하는 사례는 남북전쟁과 세계대전에서 이 미 알려졌지만, 베트남 참전 미군의 증상 을 연구한 뒤에야 1980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가 공식 진단명으로 등재 되었다. 월경 전 불쾌장애는 20여 년간 질환 후보 에 올라 연구되다가 2013년에 정식 진단이 되었다.

 

위의 예시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정신과 진단에 대한 고민이라면, 조현병에서 흔히 보이는 망상에는 시대상이 반영되기도 한 다. 과거 유신시절에는 중앙정보부가 감시 한다는 호소가 흔하였으나, 20세기 말에 는 에이즈에 감염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 댓글에서 자신을 모함하거나 휴대폰 정보를 훔쳐간 다는 내용이 자주 보인다.

 

적절한 치료는 무엇인가?

조현병은 편견 등의 이유로 2011년 정신분열병에서 조현병으로 개명되었으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로 위험하고 부정적인 이 미지가 씌워졌다.

 

정신질환자가 위험하다는 인식은 편견에 불과하고 범죄율도 매우 낮다는 것은 잘 알 려져 있다. 대검찰청에서 집계해 발간하는 범죄분석자료에 따르면 2016년 전체 범죄 자 수는 약 200만 명, 이 중 정신질환자는 8,300여명으로 약 0.4%에 불과하다. 하지만 살인 등 강력 범죄만 살펴보면, 이는 중증정신질환자가 적절히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적절한 치료는 무엇인가? 정신 질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도 인권을 보호하는 방법은 없을까?

 

선진국에서는 입원 초기에 독립된 기구 의 정신과 의사나 판사가 직접 환자를 평가하여 판정함으로써 인권침해를 최소화 한다. 의사가 입원 필요성을 진단하되 판사 또 는 독립된 심의기구에 속한 법률가나 정 신과 의사가 직접 환자를 조사하고 입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이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의사들도 이러한 원칙을 지지한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지 만 운용할 인력과 재원이 워낙 부족하여 대개 형식적인 서류심사에 그치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조현병으로 내원하는 환자들 중에는 잔존하는 증상으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사람도 있지 만 대다수가 학생, 주부, 근로자, 경영자, 연 구자, 공무원 등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간다.

 

조현병과 관련된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환자들은 마음이 철렁한다. “모두들 조현병 을 두려워하고 피하니까 친한 사람에게도 자 신의 질병이 알려질까 걱정돼요. 다른 환자들도 모두 치료를 잘 받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하려다보면 더 큰 문제에 봉착한다. 신중한 의사는 증상이 모호한 환자를 단 순히 기준에 꿰어 맞춰서 명쾌한 진단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진단의 어려 움과 한계를 솔직히 설명하고 경과를 관찰한다. 증상보다 맥락을 살피느라 세심 한 주의와 인내가 필요하다. 특히 정신과 환자의 경우, 사고의 충격 과 증상의 정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고 이후에 오히려 성숙해지는 사람도 있다. 진료 경험이 쌓일수록 확신이 줄고 겸허 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단의 방식과 삶의 판단은 그리 다르지 않다. 세상일이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모호한 상황이 대부분인데도 성급히 재단하고 앞가림만 하고 보려는 경향이 늘어난다. 세심한 주의와 현명한 판단이 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이 칼럼은 중곡동 국립정신건강센터 내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에서 발간한 “NMHC 정신건강동향에 수록된 전문가 칼럼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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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12 [16:02]   ⓒ 디지털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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