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칼럼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아차산성의 역사적 내력의 검토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 아차산성의 역사적 내력 관련 논문 발표
 
디지털광진   기사입력  2019/08/20 [18:14]

사적 234호 아차산성은 명칭이 그러하듯이 백제의 아차성(阿且城)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김유신 전의 기록으로 본다면 신라의 북한산성이다. 이유는 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인 661년에 말갈과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협공하였다.

 

▲ 1990년대부터 아차산성이 신라의 북한산성임을 주장해 온 광진구의 향토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아차산성 망대지를 둘러보고 있다.   한강문화재연구원에서는  2016년 아차산성 망대지 일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고 쓰여진 기와편을 발굴하였다.    ©디지털광진

 

고구려는 수군(水軍)으로 와서 서쪽에, 말갈군은 기병(騎兵)으로 와서 동쪽에서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러한 전황을 연출할 수 있는 곳은 한강하류 위쪽 北岸의 아차산성에서만이 가능하다. 668년에 신라와 당나라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도 신라는 그들의 북한산성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까지 진격하였다. 이러한 상황 또한 지금의 아차산성에서만이 가능하다.

 

근래 2016년에 한강문화재연구원이 아차산성 망대지 일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고 쓰여진 기와편을 채집하였다. 또한 채집된 대부분의 유물들도 신라의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돌로 쌓은 성벽도 신라가 쌓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고학적인 관점에서도 아차산성은 백제의 아차성이 아니라 신라의 북한산성임이 확인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제사 소사 조의 부아악[북한산주]’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아차산성의 위치는 신라가 북한산성을 쌓기 이전에는 백제시대부터 부아악이었음이 밝혀졌다. 백제의 온조집단은 삼각산에 오른 것이 아니다. 이곳 부아악에 올라서서 한강 건너 바로 남쪽의 풍납토성의 자리를 구획하여 하남위례성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 한강 남쪽에서 바라본 홍련봉과 아차산성. 김민수 선생은 이곳을 백제의 시조 온조집단이 이곳에 올라 풍납토성의 자리를 구획했다고 논문에 밝혓다. (사진은 광진구의 사진작가인 유승률 선생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 디지털광진

 

 

[아차산성의 역사적 내력의 검토]논문 전문 보기

 

이 논문은 광진구의 향토사학자인 김민수 선생이 2019518일 동국대학교 정보문화관에서 열린 신라사학회 제185회 학술발표회에서 처음 발표한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아차성과 남평양, 북한산성의 위치, 온달전의 역사적 실체, 북한산주와 남천주와의 관계, 부아악의 위치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08/20 [18:14]   ⓒ 디지털광진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