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진보, 이제 '어머니의 사랑'을 발견하자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 지음
 
심범섭 시민기자   기사입력  2009/02/11 [10:43]
 1972년, 강사는 누가 봐도 촌 아낙, 그런데 강의실을 꽉 메운 사람들을 향해 몰아친다.
 
"하루 몇 시간 일하냐?"

"뭐, 임금 더 달라고! 흥, 뻥 차서 내 쫓기잖아!"

"천불이 나더라"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거야.... 내 말 틀리냐?"

 
▶ 심범섭 선생님     ©디지털광진 ◀
절규였다. 아니 통곡이었다. 아들을 잃고 시커먼 역사의 하늘을 향해 외치는 한 아낙의 한과 피가 서려있는 눈물이었다. 그랬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종소리가 되었고 울림이 되었다. 이 땅 민중운동의 점화였고 이 강의실을 노동운동의 성지로 태어나게 하는 고고의 소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그 노동교실이 태어나게 된 동기는 참으로 묘했다. 함께 갈 수 없는 흑과 백의 두 역사가 엇갈리며 만났으니 말이다.
 
청계노조 정인숙이 박정희 군사독재의 모범근로여성으로 뽑혀 언감생심 하늘같이 높은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중사의 악연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독재자 박정희의 영부인 육영수, 그러나 그 앞에서 참으로 당돌한 정인숙 "노동교실이 필요합니다." 앗! 그런데 이게 웬일이랴 아니 웬 횡재! 즉석에서 '오케이 싸인' 이 떨어지다니 역시 독재권력의 에너지는 개구멍에서도 작동되는 법, 하필 우리의 역사적인 <노동교실>이 저 독재자의 그늘로 뻗어 나오는 에너지에 의해 을지로6가 유림빌딩에 만들어졌다 하니...
 
하여간,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은 그렇게 해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아들의 처절한 유훈을 짊어지고 역사의 불길 속으로 사라져간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영혼이 걸어가는 발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지만, 그 길은 그녀의 아들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져간 그 불길보다 더 뜨겁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슬프고 사납게 다가 왔으니 이 때부터 이 여인이 걸어 온 운명은 이미 우리가 다 보고 듣고 알고 있으니 말해 뭣하겠는가.
 
사실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명은 그 뉘게도 맡겨질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짐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가 저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을 피해 안전을 도모하고 있을 때 우리의 몫을 짊어지고 겪어낸 이 여인에게 무슨 위로를 보내야 할까. 그 참담한 송구스러움과 죄송함을 어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이미 민주주의는 다른 이들에게 넘어 갔지만, 그러나 돌이켜 정리해 볼 것이 있다. 그의 발길을 따라 장기표,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백기완, 장준하 등 수 많은 먹물들이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주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독재에 대한 투쟁도 아니며 노동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아들이 남긴 말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을 따라 아들의 친구와 그 친구들의 공간인 세상을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그 아들의 정신이 담긴 세상자체를 아들로 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어머니로서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아들의 마음이 담긴 이 세상의 어머니가 된 듯하지 않았는가.
 
그가 목숨을 걸고 마치 악마처럼 극악스럽게 대들었던 저항의 현장에서 우리가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오직 자식을 향한 모성으로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똑똑해서도 잘나서도 위대해서도 더구나 무슨 진보적인 생각이 있어서도 아니고 단지 '어머니'의 사랑 그 모성이 작동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지식과 사상 그리고 철학과 진보적인 무장 다시 말해 부성적 가치로서가 아니라 모성적 가치만이 작동시킬 수 투쟁의 위력이었다.
       
그것은 바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확장한 모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모성이 진보지성을 넘어선 것이다.
 
지식인이 설계한 대안은 겉모양이 제법 그럴싸하지만 그 공간에 사람의 마음이 더구나 민중의 마음이 내려앉을 따듯한 자리는 없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자본주의는 지금 한창 신자유주의라는 불도저로 지구촌에 새마을을 건설하고 있다. 과학적 유물론은 이제 힘을 잃었다.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근대 이성을 계승한 관념론이 문명에 의해 모든 과학적 유물론을 대신 하면서 중산층은 물론 민중들까지 끌어안고 통합해 나가고 있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이 과학적 유물론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보진영이 기대고 있는 과학적 유물론은 새로운 가치를 찾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이제 과학적 유물론의 근본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유물론이 인간의 가치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임을 인정하고 생명과 따듯한 인간 그 인간들의 세상을 유물론의 중심으로 담아내는 새로운 설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과 생명과 자연과 지구와 우주가 새롭게 발견되고 해석되는 과학으로 유물론이 거듭나야 한다.
 
생명의 본질에서 과학적 사고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야말로 모성을 실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은 영원히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아들의 유훈을 짊어지고 절규하고 절규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참으로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 그 인간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9/02/11 [10:43]   ⓒ 디지털광진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